김곡(金鵠)
생몰년 미상.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 김장(金裝)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라 해주현(海州縣)
자사(刺史)까지 지낸 뒤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당나라에 있을 때 출생하였다.
신라에서는 숙위학생(宿衛學生)의 이름으로
많은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885년(헌강왕 11) 하정사(賀正使)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김영(金穎)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때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를 포함하여 여덟 사람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의·식·주의 각별한
배려를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조정에 요청하고
있다.
그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김대비(金大悲)
생몰년 미상.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이 죽은 뒤 그의 목을 탈취하려
했던 인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측과 한국측의
기록이 각각 다르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혜능이 “내가 죽은
뒤 동방에서 온 인물이 내
목을 탈취하리라.”고 유언함에 따라, 제자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육조대사의 목부분을 쇠로
감아서 탑에 모셨다.
그뒤 722년(성덕왕 21)에 괴한이
그 탑에 접근하자 붙잡아
문초하였는데, 그는
장정만(張淨滿)이라는 사람으로서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 승려 김대비에게
2만냥을 받았는데,
육조대사의 목을 얻어
해동에서 공양하게 함이라.”고 대답하였다.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다스리면 중죄가 되겠으나,
고승을 공양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죄를
사면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육조대사의
머리는 중국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비가
무사히 훔쳐서 신라로 귀국했고,
그것을 하동군 쌍계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의 비에 의하면 이곳에
육조영당(六祖影堂)이 있다고 하였으며,
김정희(金正喜)는 쌍계사의 탑전(塔殿)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上塔)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사학자 이능화(李能和)도 이 점을
중시하면서 그 법당을 해체하여
사실을 확인하기는 쉬우나,
그로 말미암아 외도(外道)들의 표적이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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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악(金渥)
생몰년 미상. 신라
헌강왕 때 당나라에 간 유학생.
876년(헌강왕
2)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의 〈신라왕여당강서고대부상장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에는
고상(高湘)이
고시관이 되어 신라의 박인범(朴仁範)과 함께
두 사람을 합격시킨 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문성왕 때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한 이래 당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등과한
자가 58인이고, 5대(五代)에는
32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저명한 자로서는
최이정(崔利貞) 등 십수인이다. 그 중에서도 그는 예(禮)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신라와 후백제의 시랑(侍郎), 고려 때 학사(學士)인 김악(金渥, 金樂·金岳)과는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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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金仁圭)
생몰년 미상. 신라
시대의 문신.
출신이나 경력은 잘
알 수 없으나, 884년(헌강왕 10) 당시의
관작은 검교원외랑수한림랑사비은어대(檢校員外郞守翰林郞賜緋銀魚袋)였다. 이해 헌강왕
명령을 받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막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활약 하고 있던 최치원(崔致遠)을 귀국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입회남사(入淮南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 었다.
당시 사절단에는 최치원의
동생인 서원(棲遠)이 녹사(錄事)로서 동행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양주(揚州)에 도착하였다.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보면 이때 김인규·최치원일행의
귀국길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양주에서
회남운하를 따라 초주(楚州) 산양현(山陽縣)으로 향하였고,
그런 다음 초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
산둥반도(山東半島)
끝 등주(登州)
등모(登牟)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참산(讒山, 현재 이름은
#부54山)에
올라 산신에 제사한 뒤 황
해를 건너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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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천(金周川)
생몰년 미상. 신라
때의 관리.
태종무열왕의 6대손이며 무염(無染)의 할아버지로서 관등은
한찬(韓粲:대아찬)에 이르렀다.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한 〈무염화상비명병서
無染和尙碑銘幷序〉에
의하면 “무염대사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10세손으로 속성은
김씨이니 무열대왕(武烈大王)이 8대조가 되며,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
골품은 진골이요, 위계(位階)는 한찬이다.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출장입상(出將入相)한 가문으로 알려졌으며,
아버지는 범청(範淸)으로 진골에서
한 등급 낮아진 득난(得難)이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주천은 무열왕의
6세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강릉김씨의 시조인
주원(周元)도
태종무열왕의 6세손으로
주천과 주원은 형제항렬이
된다.
한편, 주원의 아들
헌창(憲昌)이
822년(헌덕왕
14) 3월 모반을 일으켰다가
잡혀죽으니 주천의 아들
범청도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범청이 진골에서
6두품 득난으로 품계가
강등된 것도 이 때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주원은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선덕왕이
죽은 뒤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바 있으며, 헌창의 모반사건도 결국
선대의 왕위찬탈의 원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반사건은
원성왕계의 하대 왕실에
대하여, 중대 무열왕계가
연합하여 도전하였던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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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염(無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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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888(애장왕2-진성여왕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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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無量)/무주(無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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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낭혜(大朗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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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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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신동(海東神童) |
무염(無染)
801(애장왕 2)∼888(진성여왕
2). 승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
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라고도 한다.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2세에 출가하여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 오읍동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법성은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주었으며, 당나라
유학을 권고하였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화엄학이 크게 성행하였으므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공부한 뒤,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그러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흑산도에 기착하여
당나라로 가지 못하였다.
821년(헌덕왕
13) 다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서
선법(禪法)을
물었다. 여만은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같은 신라의 젊은이는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뒤 무염은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 법맥(法脈)을 이어받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20여년 동안 이와같은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자 그의 이름은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렀다.
847년(문성왕
7) 귀국하자 왕자 흔(昕)이 공주 성주사(聖住寺)에 머무르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이 절을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년 동안 교화하였다.
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였다. 그는 한때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여
상주 심묘사(深妙寺)로 옮겨 숨어 살기도 하였다.
또한, 경문왕 때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궁중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住)를 무주(無住)라 하고,
나를 모르는 자는 무염을
유염(有染)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성격은 공손하고 자애로웠으며
손님을 대할 때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승려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었다. 절에 큰 불사(佛事)가 있을 때
앞장서서 일을 하였고,
평소에도 물을 긷고
나무를 하였다.
89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이라 하였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곤(崔仁滾)이 쓴 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에 있다.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영원(靈源)·현영(玄影)·승량(僧亮)·여엄(麗嚴)·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1293년(충렬왕
19) 천책(天#책16)이 지은 《선문보장록
禪門寶藏錄》에는 그의
〈무설토론 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와 선종 조사(祖師)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같은
구분은 그에 의해서 최초로
도입되었다.
또한,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이
조도라고 정의하였고,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선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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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朴球)
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출신의 문인.
당나라에 유학하여
오랫동안 체재하면서 당나라의
이름난 문인들과 널리 교유한
것으로 보아 문인으로서의
그의 능력도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던 것 같다.
특히, 최치원(崔致遠)과도 교유한
바 있고 함통(咸通)
연간(860∼873)의 소위
방림십철(芳林十哲)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장교(張喬)와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박구가
귀국할 당시 장교는 그의
귀국을 애석해 하며 ‘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碁待詔朴球歸新羅)’라는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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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옹(朴邕)
생몰년 미상. 신라
헌강왕 때의 문사(文士).
성주사낭혜화상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寶光塔碑)의 비문에 그의 행적의
일단이 보이고 있다.
즉, 881년(헌강왕
7)에 문한직(文翰職)인 시독한림(侍讀翰林)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낭혜화상을
전송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원유향
桂苑遺香》의 주(註)나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에
의하면, 당시 그는
시독한림랑 겸 숭문대서서원직학사(侍讀翰林郎兼崇文臺瑞書院直學士)로서 살찬(薩飡)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불교신앙이 돈독함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당대의 왕권은 매우 취약하여
종교세력자인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낭혜에 대하여
지극한 예우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한때 궁궐에 들렀던
선사를 전송하게 된 헌강왕은
그 이별을 아쉬워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전송의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에 왕손인 억영(#억02榮)이 먼저
시를 짓고 이어 박옹이 증행시(贈行詩)의 서문을
지었다. 그런데 이
서문이 《청장관전서》의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에
전하고 있다. 내용은
대사(大師)의
행장을 노래한 것인데,
특히 신라왕실과의
두터운 교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덕무는 이
글을 평하여 말하기를,
영영(英英)한 정채(精彩)는 없으나 오히려 당나라
문체의 전형(典型)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와 통일신라시대
도당유학의 유행 등을 생각해
보면, 박옹은 최치원(崔致遠) 등 당시의
문사들처럼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하였던 육두품(六頭品)출신의 지식인으로
헌강왕의 측근에서 문한을
담당하며 왕을 보필하였던
것 같다.
三國史記, 桂苑遺香,
靑莊館全書, 朝鮮金石總覽,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新羅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金基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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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蘇恩)
생몰년 미상. 신라
때 당나라에 파견된 외교사절.
최치원(崔致遠)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級飡) 김영(金穎)이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갈 때 2인의 수령(首領)
중 한 사람으로 김영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기탁(祈卓) 등
8인이 대령(大領)으로서 역시 하정사를
수행하였으며,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 등 8인이었다.
그런데 입조장에 의하면
이때 수령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뽑았다고 하므로
소은은 중국 유학생출신임이
분명하다.
종래 소은이 수령으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연대를
최신지의 경력을 역산하여
885년(헌강왕
11)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입조장의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해볼 때 진성여왕 말년,
혹은 효공왕 즉위초인
897년경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東文選, 東史綱目,
崔致遠글遣宿글學生首領等入朝狀及글奏請宿글學生還蕃棚來∝뀄쫘담젱⊆┃∼
今西龍, 新羅史硏究,
19)33).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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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도(烏炤度)
생몰년 미상. 발해
경왕 대현석(大玄錫)
때의 정치가.
경왕 연간(870∼900)에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賓貢科)에 진사로 합격하였다.
그때 함께 응시하였던
신라의 이동(李同)보다 석차가 위에 있는
영광을 얻었다. 이를
가리켜 최치원(崔致遠)은 “한 나라(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광찬(光贊)이 891년(경왕 22)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나,
석차가 신라의 최언위(崔彦#휘01)보다
밑이었다.
마침 오소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고 전에 자신이 이동보다
위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아들 광찬 역시
윗석차에 놓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은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광찬보다 빼어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쟁장사건은 신라와
발해 사이의 대립양상이
당나라를 매개로 한 문화적
우열의 경쟁으로 기울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高麗史, 崔文昌候全集,
渤海國志長編(金毓#불25, 華文書局,
1934). 〈韓圭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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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추(李桓樞) (a.k.a. 이환상
李奐相)
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서예가. 일명 환상(奐相).
벼슬은 상주국(上柱國)을 지냈다.
글씨는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를
기본으로 강렬한 필치가
돋보인다.
937년(태조 20)에는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를, 939년에는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庵眞空大師普法塔碑)를 썼는데, 이 세
비 모두 최언위(崔彦#휘01)가 찬하였다.
최언위는 최치원(崔致遠)의 사촌동생으로
당시 글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환추 또한 당대 명필로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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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智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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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882(헌덕왕16-헌강왕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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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헌(道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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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智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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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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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智詵)
824(헌덕왕 16)∼882(헌강왕
8). 신라 말기의 고승(高僧).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산조(開山祖). 경주김씨.
호는 도헌(道憲).
아버지는 찬양(贊壤)이며,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다.
승견불(勝見佛)
때의 승려였던 자가
자주 분노하여 용이 되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니 받아줄 것을 간청하는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사월초파일에 낳았다.
태어나자 며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는데,
도인이 찾아와 어머니가
육식과 파·마늘 등을 금할
것을 깨우쳤다. 그대로
하였더니 젖을 먹기 시작하였다.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휴대덕(梵休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였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하여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
그뒤 정식으로 계를
받고 출가하였는데, 이때 맑은 구슬 한개를
얻었다고 한다.
840년(문성왕
2) 경의율사(瓊儀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정진하여
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864년(경문왕
4)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주지로 있다가 심충(沈忠)의 청으로
희양산에 가서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다.
881년(헌강왕
7) 왕은 사신을 보내 주위의
땅을 사찰 소유로 정하고
사찰명을 봉암사(鳳巖寺)라 하였다. 그리고
산에서 나오게 하여 선원사(禪院寺)에 머물게
한 뒤 월지궁(月池宮)으로 초빙하여 심요(心要)를 물었다.
그뒤 다시 봉암사로
돌아와서 59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지증(智證),
탑호는 적조(寂照)이다. 현재 봉암사에
남아 있는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 최치원이
지은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법맥은 사조(四祖)―법랑(法朗)―신행(信行)―준범(遵範)―혜은―지증으로
이어지며, 제자로는
양부(楊孚)·성견(性#견28)·계휘(繼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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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유(崔匡裕)
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885년(헌강왕
11) 왕이 시전중감(試殿中監) 김근(金僅)을 당나라에
경하부사(慶賀副使)로 보낼 때, 김무선(金茂先)·최환(崔渙) 등과 함께
파견되어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유학하여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시(詩)에 능하여
당나라에서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박인범(朴仁範) 등과 함께
신라 10현(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당나라에
있을 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간행된 《십초시 十抄詩》에도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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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崔元)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외교관.
《최문창후전집 崔文昌侯全集》에
실린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과
〈사은표 謝恩表〉 등에
의하면 최원은 최치원(崔致遠)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891년(진성여왕
5)에 당나라 소종(昭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행(使行)의 판관(判官)으로 갔다가 6년간
당나라에 머문 뒤 897년(효공왕 1) 7월 5일에 돌아왔다.
당나라에 갔을 때의
관직은 다만 검교사부낭중(檢校祠部郎中)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사자금어대신(賜紫金魚袋臣)이
되어서 왔다.
한편, 돌아올 때에
효공왕의 할아버지 경문왕과
아버지 헌강왕의 증직관고(贈職官告)를 가지고
왔다.